중국 국가도서관
National Library of China
중국국가도서관(中国国家圖書館, National Library of China, NLC)은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에 있는 국립 도서관이다. 아시아 최대, 세계에서 다섯 번째 규모의 도서관으로 장서 수는 2003년 말 기준 약 2,400여만 점에 달한다.
1909년 경사도서관(京师图书馆)으로 설립되어 1912년 정식 개관하였다. 그 뒤 몇 차례의 개칭을 거치며 1949년 국립북경도서관(国立北京图书馆), 1998년 중국국가도서관(中国国家图书馆)으로 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 문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중국 도서관의 역사
중국에서 도서관의 역사는 문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은허(殷墟)에서 발굴된 수많은 갑골(胛骨), 문자가 새겨진 뼈가 나온 그 자리가 바로 당시의 도서관이었다. 노자(老子)는 원래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史)였으며, 이 사의 직무는 오늘날의 사서(司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시절에 공자(孔子)가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대해 물었다. 당시 ‘예’란 문물제도 전반을 가리킨다. 노자가 공자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수장실에 근무하면서 왕실의 도서를 섭렵할 수 있었던 데 있다.
그 후, 국가와 왕실, 개인의 도서관이 수없이 출전하였지만, 근대적 도서관의 역사는 이제 100년이 좀 넘는다.
1910년에 남경(南京)에서 문을 연 강남도서관(江南圖書館), 지금의 남경도서관이 최초의 근대적 공공 도서관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최대 ․ 최고 도서관은 북경의 중국국가도서관(中国国家图书馆, National Library of China, NLC)이다.
* 중국의 최대, 최고 도서관
중국국가도서관은 중국의 국가총서고(國家總書庫), 국가서목중심(國家書目中心), 국가고적보호중심(國家古籍保護中心) 남대(南大街) 33호(號)에 있으며, 백석교(白石橋)가 놓인 고량하(高粱河) 바로 옆이다. 인근에는 유명한 자죽원공원(紫竹院公園)이 있다. 분관은 고적관(古籍館)이라고 하며 북경시 서성구(西城區) 문진가(文津街)에 있다. 북해공원(北海公園) 서안이 북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금오옥동교(金鼇玉蝀橋)의 서단이다.
총관은 1987년에 낙성한 남구(南區)와 2008년에 완공한 북구(北區)로 구성된다. 총관의 부지 면적은 7만 2,400평방미터, 건축 면적은 14만 평방미터다. 남구의 주루(主樓)는 한당풍(漢唐風)의 쌍탑형(雙塔形) 고루(高樓)이다. 몸통은 흰색이며, 지붕에는 물을 상징하는 남색 기와를 얹어 도서의 가장 큰 재앙인 불을 경계하는 뜻을 담았다. 서고로 쓰는 이 주루는 지상 19층, 지하 3층으로서 총 면적 6만 평방미터이며, 2천만 책을 수용할 수 있다. 북군 현대식 건축물로 건축 면적은 8만 평방미터이다. 국가도서관 전체의 건축 면적은 25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중국 국가도서관 장서는 각종 도서를 망라하여 2010년 말 현재 2,900만 책(건)이며, 2013년에는 3천만 책이 넘으리라 추산된다. 중문 도서와 외국어 도서가 반반을 차지한다. 가장 이른 기록물은 역시 은허(殷墟)갑골(胛骨)이며, 700여 년 전 남송(南宋)황실의 집희전(緝熙澱)장서도 수장하고 있다. 현대의 도서 이외에 선본 고적, 금석 탁본, 고대 지도, 돈황 문서, 소수민족 도적(圖籍), 명인 수고(手稿), 혁명역사문헌, 족보, 보통 고적 등 260여 만 책(건)이 있다. 그 중 선본 고적이 27만 책, 보통 고적이 164만 책이다. 이 가운데 돈황유서(敦煌遺書), 조성금장(趙城金藏), 영락대전(永樂大典), 문진각사고전서(文津閣四庫全書)를 “4대 전장(專藏)”이라고 부른다. 외국어 도서에는 1473년부터 1477년 사이에 인쇄된 유럽의 이른바 “요람본(Incunabula)”도 들어 있다.
* 중국 근현대 100년사의 축소판
100년 국가도서관의 역사는 중국 근현대 100년사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해혁명 전야인 1909년 경사도서관(京師圖書館)으로 출발한 이래 청의 몰락과 중화민국 건국, 북경의 북양(北洋), 군벌정부(軍閥政府)와 남경(南京)의 국민정부(國民政府), 북벌(北伐)과 항일(抗日), 국공내전(國共內戰),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중화민국으로 나뉘는 그야말로 격동 근현대사를 국가도서관은 고스란히 감내하면서 수많은 전적을 수집 ․ 보호하였다. 그 전통을 이어 중국 정부는 국가도서관을 현대적 공공 도서관으로서 건설하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서세(西勢)와 서학(西學)이 중국으로 밀려들던 20세기 초에 근대화를 열망하던 중국 지식인들은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건립을 추진하였다. 학부상서(學部尙書) 장지동(張之洞)의 주청을 받아들여 1909년 9월 9일 선통제(宣統帝,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경사도서관(京師圖書館) 건립을 비준하였다. 4품 한림원(翰林阮) 편수(編修) 무전손(繆荃孫, 1844~1919)을 정감독(正監督)에 임명하고, 관사(館舍)는 북경 십찰해(十刹海) 북안 광화사(廣化寺)에 두었다.
무전손은 1907년에 남경에서 강남도서관(江南圖書館, 지금의 南京圖書館)을 건립한 경험이 있었으며, 오늘날 중국 근대 도서관의 비조(鼻祖)로 칭송 받는다. 그는 경사도서관의 초대 관장으로서 도서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특히 전적의 보호에 힘을 쏟았다. 내각대고(內閣大庫), 한림원(翰林院)과 국자감 남학(國子監 南學)의 장서 및 문진각(文津閣)의 사고전서(四庫全書), 돈황(敦煌)에서 뒤늦게 수습한 문서를 모아 기본 장서로 삼았다.
1931년 서안문대가(西安門大街)의 동쪽 구역 북해의 서안(西岸)에 새 관사를 낙성하였으며, 이 관사는 지금 고적관(古籍館)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설 자금은 역시 의화단 사건 배상금으로 충당하였다. 외관은 중국 전통 궁전식, 내부 설비는 서양식으로 건설하여 당시 중국 최대 ․ 최고의 도서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 관사를 낙성한 후 승덕(承德) 문진각(文津閣)에 보관했던 사고전서를 모두 옮겨 왔고, 거리 이름도 문진가로 바꾸었다.
항일전쟁(抗日戰爭)기간에 도서관의 일부 장서와 직원은 남쪽으로 피난하여 상해(上海), 홍콩, 곤명(昆明), 중경(重慶) 등지에 사무처를 세웠다. 항일전쟁 후 각지의 사무처와 장서는 돌아왔으나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관했던 선본서(善本書)와 남경에서 대북(臺北)으로 가져간 내각대고여도(內閣大庫輿圖) 18상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성립 후 도서관은 문화부(文化部)에 소속되었다. 1949년 9월 27일에는 국립북경도서관(国立北京图书馆)으로, 1951년 6월에는 북경도서관으로 개명하였다. 1957년 국무원(國務院)이 전국도서협조방안(全國圖書協調方案)을 제정하고, 북경도서관을 전국제일중심도서관위원회(全國第一中心圖書館委員會)의 주임 기관으로 정하여 도서의 분류, 목록, 인원 배양 등을 주관하게 함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도서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58년 6월에는 북경시에 소속시켰다가 1960년 11월에 다시 문화부에 귀속시켰다.
1975년 3월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총리가 북경도서관 신관 건설을 제의하고 비준하였고, 1987년에 완공하였으며,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 제자(題字)하였다. 그 후 1998년 12월 12일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북경도서관을 국가도서관으로 개명하였으며, 1999년 4월 16일 장쩌민(江澤民, 1926~) 주석이 제자 하였다.
2004년 12월 28일, 국가도서관 2기 공정 및 국가디지털도서관(國家數字圖書館) 공정을 착공하여 총관의 북구 관사를 2008년 9월 9일에 개관하였다. 북구 지역은 도서 이외에도 음악, 영화, 디지털자료 등 다중매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국가도서관은 38개의 열람실이 연중무휴로 운영되고 있으며, 하루 평균 약 7~8천명의 이용자가 1만여 권의 자료를 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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