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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 New World Library

[2호]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Biblioteca Mediceo Laurenziana(이탈리아어)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메디치가의 코시모 일 베키오(Cosimo de’ Medici, il Vecchio, 1389~1464)가 창설하였으나 로렌초 데 메데치 일 마니피크에 의하여 건설되었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메디치 가(家)가 수집한 고대, 중세의 사본으로 유명하다. 건물은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1524년 착공, 1524~27, 1530~34년에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입구 부분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가 1560년 미켈란젤로 안(案)에 따라 암마나티가 입구 계단을 만들었다. 고전주의적 요소를 이용하면서도 세부 표현에는 비합리적인 것이 있으며(이상한 비례, 힘을 받지 않는 지주(支柱), 막힌 창 등) 마니에리슴 정신을 예고하고 있으며 화려한 구성미를 자랑하고 있다.

 

도서관 장서의 구성

 

  15세기 메디치가(家)의 코시모(the Elder)와 로렌초(the Magnificent)에 의해 수집된 책이나 필사본이 소장된 도서관.

  1494년 이전에 장서 중 일부가 공개되었으나 1494년에 메디치가가 몰락하고 그들의 저택이 몰수되었다. 남아 있던 장서들은 로마로 옮겨진 뒤, 1513년에 교황 레오 10세가 된 로렌초의 아들 조반니에 의해 보관되었다. 1523년 로렌초의 조카 줄리오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자 그는 이 장서들을 피렌체로 돌려보낸 뒤, 미켈란젤로에게 그 장서들을 보관할 건물을 설계하도록 명했다. 1523년에 첫 도면이 만들어졌고 천장이 디자인되었으나, 게으른 2명의 장인에 의해 10년 뒤에 완성되었다. 천장 디자인을 본 뜬 모자이크식 바닥과 조각된 의자들은 거장이 스케치한 뒤, 여러 명의 조수들이 만들었다. 미켈란젤로는 도서관 계단을 디자인했으며, 이 모델은 1559년 바르톨로메우 암마나티와 조르조 바사리에 의해 완성되었다. 1571년 이 도서관은 미완성으로 개관되었다. 11세기 이전에는 700여 권의 사본이 있었지만 개관 당시에는 1만 500권의 필사본이 소장되었다. 이들 중 몇몇 사본은 세계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4세기(또는 5세기) 베르길리우스의 유명한 시,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10세기 호라티우스의 시, 초기 고전작품들, 성서교재들, 단테의 작품 약 100편,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 Decameron〉의 복사본, 벤베누토 셀리니의 자서전 등이 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6세기 건축 사조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와 매너리즘의 두 축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당시 건축가들의 대부분은 두 가지 모두를 구사하였는데 중간에서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주의 건축 또는 매너리즘 건축 중 한 가지 경향을 중심으로 잡고 다른 하나를 혼합하는 형태를 띠곤 했다. 그러나 두 사조 모두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최고 수준의 걸작을 남긴 건축가각 없지는 않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미켈란젤로이다.

  미켈란젤로의 건축은 피렌체 시기와 로마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매너리즘 경향을 강하게 보였던 시기는 피렌체 시기였다. 이 당시 남긴 작품들을 살펴보면, 개별 건축 부재는 고전주의의 표준 규범을 따랐으며 전체 구성도 언뜻 보면 고전주의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천천히 뜯어보면 기발한 아이디어로 구성 법칙에 패러디를 가해 은유적이고 교묘한 일탈을 꾀하였다. 이러한 솜씨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에 있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이다.

 

 

설계

  메디치 가문 출신의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는 산 로렌초 수도원에 도서관을 지어 메디치 가문이 수집해온 진귀한 필사본과 초창기 인쇄본들을 보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추기경이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추대된 1523년에야 본격적인 설계가 시작되었는데 클레멘스 7세의 생각에, 도서관은 책으로 가득 채워져 허세를 부리는 공간이 아니라 책을 활용하는 일종의 작업장이어야 했다. 동시에 이 도서관은 메디치 가문이 단순히 재력을 바탕으로 한 상인 집안이 아닌, 지적이면서 독실한 기독교 사회의 대표 가문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문제는 도서관을 지을 공간이었다. 산 로렌초 성당과 맞닿아 있는 수도원 건물 위층에 지어질 예정인데다가 한쪽으로는 한 세기 전 브루넬레스코가 설계한 성구실과 트랜셉트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건축 공간의 한계는 도서관 설계에 있어서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다.

 

  처음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설계를 의뢰받았을 때 미켈란젤로는 개략적인 아이디어를 스케치로 남겼다. 이 스케치는 1달러 지폐보다 약간 큰 자투리 종이에 그린 것으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이 스케치에는 이중으로 그린 직사각형과 돌 버팀벽 부분만이 그려져 있고, 직사각형 위에 rto(정원)와 밑에 쓰인 chiostro(안뜰을 둘러싼 복도)라는 글자가 쓰여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뜯겨져서 남아있지 않다.

  클레멘스 7세는 미켈란젤로가 도서관 설계에 착수한 1523년부터 1526년까지 1주일에 서너 번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도서관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천장의 모습은 물론 열람실에 서가를 몇 개나 설치할지, 서가 하나에는 책을 몇 권이나 놓을 것인지, 책상을 만들 호두나무는 어디서 구할 생각인지 등등...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제안을 어떤 경우에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어떤 경우에는 철저히 무시하면서 교황이 설계도를 최종적으로 승인하기 석 달 전인 1525년 12월에 벽을 올리기 시작했다.

 

 

구성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은 크게 전실과 열람실로 구성되는데 그 둘 사이는 계단이 이어주고 있다. ‘리체토’라고 불리는 전실은 기존 수도원 건물과 도서관 건물을 이어주는 곳이었다. 최초 미켈란젤로가 구상했던 것은 천장에 채광창을 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지만 지붕이 약해질 것을 우려한 클레멘스 7세의 지시로 클리어스토리 창으로 바꾸어 빛이 들어오게 했다. 전실의 투스칸식 이중 기둥은 벽속으로 묻은 형태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내부 공간을 더 넓게 쓰려고 고안한 장치이면서 동시에 고전주의 건축 규범을 깬 파격적인 기법이었다.

  계단은 전실 바닥에서 세 갈래로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하나로 합쳐지고 합쳐진 계단이 열람실 입구로 연결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가운데 계단의 윤곽은 바깥으로 배가 부른 둥근 곡선으로 처리하여 마치 용암이 열람실 입구에서 전실 방향으로 흘러내린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초 미켈란젤로의 설계에서는 호두나무로 설계가 되었으나 그가 1534년 피렌체를 떠난 후 1559년에 조각가 바르톨메오 암마나티가 회색 화산암으로 완성하였다.

  열람실은 길이 46.2m, 폭 10.5m, 높이 8.4m의 직사각형 형태를 띠고 있다. 가운데 통로를 사이로 두 줄로 열람석이 나열되어 있다. 벽기둥으로 둘러싸인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며 편평한 목제 천장의 정교한 디자인이 그대로 바닥에 비치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벽면 설계로 인해 전실과 달리 열람실 내부에서는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벽기둥으로 장식된 채광창과 기다랗게 늘여진 듯한 전실 구성과 이중 기둥, 그리고 열람실에서 흘러내리는 듯한 계단, 이들이 보여주는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은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을 매너리즘 건축의 대표로서 손색이 없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매너리즘이란?

  미술사에서의 매너리즘은 르네상스 시기 최고조에 달한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일종의 과도기적 미술 양식을 말한다. 매너리즘의 특징은 한 마디로 ‘탈 법칙’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더 큰 미적 효과를 추구하기 위해 예술가들의 독창성과 상상력을 가미하는 것이다.

  매너리즘 양식은 주로 회화에서 나타난 것이 일반적이지만 건축 분야에도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고전주의 건축에서는 건축 부재의 크기와 위치, 부재들 사이의 비례와 배열 등 엄격하게 지켜야 할 규범이 많았으나 매너리즘 건축에서는 이 규범을 깨뜨린 것이었다.